빛이 이끄는 곳으로:백희성 장편소설 - 한국소설 |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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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
작가이자 건축디자이너. 장 누벨 건축사무소를 비롯해 프랑스에서 10여 년간 건축가로 활약하였으며, 현재 KEAB 건축 대표이다. ‘기억을 담은 건축’을 모티브로 하여 사람들의 추억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에세이 『환상적 생각』이 있다.
목차
- 1 내 삶에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
2 이상한 집주인 그리고 결심
3 이상한 병원과 그들
4 닫혀 버린 비밀
5 비밀이 기다린 사람
6 아나톨 가르니아
7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일기
8 이어진 비밀
9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공간
10 다시 살아나는 집
11 기억을 담은 공간
12 라자르 가르니아
13 제자리로
14 추억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살아보고 싶어 하는 그 시테섬에 그렇게 싼 가격의 집이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제안했던 금액은 은행 융자를 통해 마련한 5만 유로, 한화로 7천만 원 정도였다. 나는 아주 싸고 낡은 집을 원했다.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이랄까. 스스로 고치고 만들어 나에게 선물할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파리 시내에 이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집은 없었다. (…) 시테섬에는 프랑스인 모두가 사랑하는 노트르담성당뿐 아니라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이 있고 아름다운 센강까지 바라다볼 수 있기 때문에 그곳에 집 한 채를 소유하는 것은 많은 프랑스인들의 로망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우리는 그 집 앞에 당도했다.
이 거대한 저택에 빛이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 이유는 건물이 폐허이기 때문이었다. 강렬한 빛과 어둠이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안에서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 천장을 보니 큰 틈과 구멍이 많았다. 그 찢어진 틈새 중 일부는 천장에서 끝나지 않고 내벽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따뜻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려왔다. 벽과 천장 곳곳에는 비스듬한 거울이 여럿 걸려 있었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과 따뜻한 빛줄기 속의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왈쳐요양병원의 정문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표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무섭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비밀의 여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잔디가 덮인 바닥을 보면서 그녀의 비밀이 아주 깊은 곳에 있음을 직감했다. 이 병원을 감싸고 있는 빛줄기 또한 그녀의 매력을 발산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비밀이 많은 미지의 ‘여인’이었다. 결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프랑스와라는 건축가가 만든 이 ‘여인’을 샅샅이 알아보고 싶었다.
‘왜 4월 15일인가? 그리고 왜 당신이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크리스 부인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그녀가 이미 전에 이 문장을 보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황당한 표정을 보고 궁금한 나머지 이 문장을 확인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좀 서툴지만 뭔가를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노인들도 모두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이 이곳까지 오게 된 나를 테스트하려는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테스트란 말인가?
이 파괴된 중세 수도원을 목도한 건축가 프랑스와 왈쳐! 그는 이 파괴된 잔재를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했다. 그리고 그가 재현시킨 폐허였던 중세 수도원과 그 폐허에서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유리와 철골 구조는 시간이 흘러 함께 늙어가는 부모와 자식처럼 느껴졌다. 재질은 전혀 다르지만 예전의 석조 공간과 프랑스와가 지은 유리와 철골 구조가 완벽히 결합했고, 현대 건축가인 내게는 둘 다 완벽한 한 편의 역사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어린 제게 이상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네요. 바니시 칠이 마르기 전에 소중한 것을 놓아두면 책상이 그걸 평생 기억해 준다고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역시나 프랑스와 왈쳐는 기술이나 기능적으로만 사물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영혼을 담는 방법을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마추어의 책상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와를 통해서 느낀 것은 불편하고 부족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저마다의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빛과 기억이라는 경이로운 설계로 펼쳐내는
천재 건축가 백희성의 첫 번째 장편소설
★★★ 국내 최초, 실화 바탕의 건축 팩션
★★★ 2024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하이라이트
건축가이자 작가이면서 다방면에서 예술가로 활약 중인 그는 파리의 저택 주인들로부터 답장을 받아 초대된 자리에서 집에 스며든 아름다운 추억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여러 저택에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들은 고스란히 이 소설의 글감이 되었는데, 건축가로 일해 오면서 어디서도 듣고 배운 적 없는 ‘진짜 집의 이야기’가 사람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온기 어린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다시 설계하여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자신의 방식으로 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사랑의 메시지를 건축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그려내면서, 지적 호기심과 따듯한 감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유실되지 않도록 건물에 꼭꼭 숨겨둔 아버지의 뜻을 찾아내기 위해 치열한 추론이 펼쳐지고, 끝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삶의 희망과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써 슬픔과 상실에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 ‘기억의 힘’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